씁쓸한 희곡의 시작은 14일 밤 10시쯤 서울중앙지검 출입기자들에게 도착한 한 통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에서 시작됐습니다.

"국정원 측에서 내일(15일) 오전 10시 내곡동 본원에서 남재준 원장이 입장발표를 한다고 알려왔음. 내일 오전 9시까지 서울지검으로 버스 2대를 보낸다고 함. 8시50분까지 각 사단 1인 참석신청자 명단을 받을 예정임. 일문일답은 없으며 방송과 신문 등 촬영기자는 '풀단'으로 구성해달라고 요구"

참으로 '국정원스러운' 일방적인 통고였습니다.

국정원의 의도는 명백해보였습니다. 국정원 직원들이 증거조작을 했다고 공식 확인된 마당에 국정원장이 TV 카메라 앞에서 대국민 사과라는 이벤트를 벌일테니 기자들이 조용히 화면앞에서 들러리를 서달라는 요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오전 10시 남재준 원장이 준비된 TV 카메라 앞에 굳은 표정으로 서면서 문제의 기자회견은 시작됐습니다.

그는 예상대로 국민에 대한 사죄를 이야기하며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하지만 "책임을 통감한다"던 그의 입에서 "국정원장직을 물러나겠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습니다.

3분여에 불과한 기자회견 대부분은 통렬한 반성보다는 증거조작은 '일부직원'들의 소행이고 국정원 개혁은 스스로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셀프개혁'에 대한 설명이 차지했습니다.

3분도 채 안되는 '이벤트'가 끝나자 몇몇 기자들은 일제히 남 원장을 향해 질문을 던졌지만, 국정원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기자회견장을 나가버렸습니다.

30여분간의 거센 항의에도 국정원 직원들은 기자들에게 아무 해명없이 돌아가는 버스에 빨리 탑승해달라는 재촉만 반복했습니다.

정작 '국민들에게 사과하겠다'던 국정원장이 국민들의 질문을 무시하고 퇴장하는 이 해괴한 상황에서 기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남재준 주연의 '블랙코미디극'에서 한낱 들러리로 전락한 현장기자들의 감정은 '무력감'과 '자괴감'이라는 두 단어가 가장 적절했다고 보입니다.

과연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답이었을까요? 처음에는 '기자로써 책무가 더 중요하다'며 자신을 다잡았지만 이제 그런 대답을 자신있게 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Posted by '하늘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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